『마지막 거인』과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전혀 다른 배경과 형식을 가진 작품이지만, 공통적으로 ‘다름’과 ‘소외된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프랑수아 플라스의 그림책 『마지막 거인』은 자연과 문명,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김중미 작가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도시 빈민가 아이들의 현실을 진솔하게 그려내며 공동체의 의미를 조명합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공존의 시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거인과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배우는 자연과 공존
『마지막 거인』은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되짚는 그림책입니다. 거인은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자,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말이 없지만 지혜롭고, 힘이 있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존재로서, 그는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의 이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험가는 거인을 처음 보았을 때 경외심을 느끼며, 그의 존재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직감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인간 중심의 욕망에 따라 문명 세계로 정보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과정은 현대 사회에서 자연이 다뤄지는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분류하고 수치화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국립공원, 보호구역, 멸종위기종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자연을 보존하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중심의 기준이 있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죠. 이는 거인을 '발견'하고, 그를 인간 사회에 전시하려 한 탐험가의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도 자연은 배경으로 존재하지만, 인간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도시 변두리의 낡은 동네, 골목길, 공터, 철길 옆 빈집들… 모두가 인간이 버리고 간 공간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자라나고, 친구를 만들며, 가족 이상의 유대를 맺습니다. 작가는 그러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통해, ‘공존’이라는 말이 단지 자연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 소외된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개념임을 드러냅니다.
거인의 세계는 인간의 손이 닿기 전까지 조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괭이부리말의 아이들 역시, 어른들의 무관심과 제도의 미비로 인해 고통받습니다. 결국 문제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선’의 부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사회는 사람을, 조건에 따라 평가하고 차별하며, ‘가치 없음’이라는 낙인을 너무 쉽게 찍습니다. 두 작품은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공존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공존이란 단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마지막 거인』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공존을 말하고,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존을 이야기합니다. 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시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해심: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
‘이해’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마지막 거인』에서 탐험가는 거인을 처음 만났을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외형, 크기, 말하지 않는 침묵… 모두가 익숙하지 않은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열며 교류하면서, 그는 거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우리가 낯선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여정과도 같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문화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면 진짜 이해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탐험가의 이해심은 개인적 경험에 머무릅니다. 그는 거인을 기억하고 회고록을 쓰지만, 문명 사회는 그 존재를 ‘소비’할 뿐입니다. 구경거리, 연구 대상, 이야기 소재로만 여기고, 결국은 그를 몰락하게 만듭니다. 이는 우리가 소수자나 타인을 대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를 잘 보여줍니다. 표면적으로는 포용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는 이해심이 공동체 안에서 아이들 사이에 작동합니다. 어른들이 무관심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고통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다가갑니다. 누군가는 부모 없이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며, 누군가는 거리에서 일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조건 없는 우정과 연대가 피어납니다. 이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해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덮어주고, 필요할 때 함께 싸우며, 누군가 울 때 조용히 곁을 지켜줍니다.
이해심은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단지 아이들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뉴스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회 이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도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요? 『마지막 거인』과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그 질문을 우리 마음속 깊이 던지며, 타인을 향한 시선을 더 따뜻하게, 더 열린 마음으로 바꾸라고 조용히 권유합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며,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말이죠.
문명과 사회 비판: 침묵의 책임을 되묻다
문명이 발전하면 모든 것이 나아질까요? 『마지막 거인』은 이 질문에 대해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방식으로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발견이라는 명목으로 존재를 지우는 일은 인간 문명이 저지른 대표적인 폭력입니다. 거인은 그런 폭력의 희생양이자, 인간 욕망의 피해자입니다. 탐험가의 행동은 처음에는 선의였지만, 그 선의가 집단의 탐욕 속에서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등장합니다. 사회는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방치합니다. 교육 시스템, 복지 제도, 지역 사회 모두가 이 아이들을 외면한 채, 그들의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이는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며, 무관심이 어떻게 침묵 속의 책임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입니다.
탐험가는 후회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거인을 죽음으로 몰았음을 인정하고, 그 기억을 책으로 남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을 남기지만,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상처 역시 남깁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공동체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문명의 이름 아래 우리가 사라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존재들이 조용히 사라졌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직접적으로 사회를 비판하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현실은 그것 자체로 충분한 고발입니다. 아이들이 겪는 고통, 외로움, 절망은 제도의 실패와 어른들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보듬고, 작은 희망을 일구며 살아갑니다. 이 점에서 작가는 비판과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합니다. 침묵 속에서 소리를 만들고, 방치된 곳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그 아이들의 힘은 문명이 배워야 할 진정한 가치입니다.
이 두 책은 말합니다. 진짜 발전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지키며, 존재의 다양성을 품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진짜 얼굴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떤 문명을 만들고 있는지,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마지막 거인』과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시대도, 배경도, 형식도 다르지만, 결국 ‘다른 존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공유합니다. 공존, 이해심,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반성은 지금 이 시대에 더없이 필요한 시선입니다. 두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존재들, 잊고 있었던 감정들, 외면했던 책임들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공존의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