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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 소년으로 보는 현대사와 표현의 자유, 인권 감수성

by eeventi 2025. 4. 18.

『만국기 소년』은 유은실 작가가 1970년대 유신 시절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눈을 통해 사회와 억압, 그리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저항을 섬세하게 담아낸 동화입니다. 단순한 성장 서사를 넘어, 독재와 침묵의 시대를 살아간 아이들의 감정과 현대사 속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어린이의 시선으로 끌어낸 이 작품은, 한국 현대사를 감각적으로 배우고 인권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교육 콘텐츠입니다. 지금부터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단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만국기를 배경으로 소년이 작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장면

1970년대 배경, '만국기 소년'은 현실을 비추는 동화

『만국기 소년』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적 현실’을 아이의 시선으로 담아냈다는 점입니다. 배경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하였으며,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 성장을 앞세우며 정치적 억압과 표현의 자유 통제를 정당화하던 시기였습니다. 학교에서는 국가가 제시한 교육이 전부였고, 선생님은 ‘권위자’로 군림하며 학생들의 생각과 감정을 억눌렀습니다. 이러한 시대상을 어린이 문학 속에서 정면으로 다루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유은실 작가는 해성이라는 소년의 감정과 일상을 통해 그것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작품 속 해성이는 만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전교생의 체육대회 훈련 속에서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공기는 ‘질문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질문하지 않도록 길들여졌고, 어른들은 침묵을 권장했습니다. 이처럼 『만국기 소년』은 단지 어린이의 성장 이야기가 아닌,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은유적 작품입니다.

또한 학교라는 공간은 단순한 교육의 장이 아니라, 그 시대의 축소판으로 등장합니다. 선생님은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벌을 받는 학생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억울함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국가와 국민 사이의 위계처럼 그려지며, 작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하나하나가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해성이의 주변 인물들도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반영합니다.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는 아이들, 부모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친구들,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모범생처럼 행동하는 급우들은 모두 억압된 시대가 만든 표상입니다. 그 속에서 해성이는 자신만의 질문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만국기 소년』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며, 단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사회 구조와 권위주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린이의 시선’으로도 역사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감수성 있는 현대사 교육의 출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침묵과 저항,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이 책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특히, '말하지 못하는 것'의 무게와, '말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감정의 층위를 아주 섬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해성이는 체육대회 준비 과정에서 부당함을 느끼고도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것”조차 금지된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직접적으로 정치적 억압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해성의 침묵은 곧 당대 사회의 ‘비표현의 강요’를 은유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말대꾸를 할 수 없고,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면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히는 구조 속에서 해성이는 자기 목소리를 잃어갑니다. 이러한 내면적 억압은 당시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똑같이 겪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해성이가 만국기를 손에 들고 운동장을 돌며, 자신의 감정을 삼키는 부분입니다. 그 순간은 단지 체육대회의 연습이 아니라, ‘억압의 퍼포먼스’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외치고 싶지만 외치지 못하는 감정,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구조, 그리고 개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은 사회. 이 모든 것이 만국기 하나에 상징처럼 담겨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부당함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환경’과 ‘심리적 안전’ 또한 필요합니다. 『만국기 소년』은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듭니다. 해성이는 결국 큰 소리로 말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 아이의 침묵 속에 깃든 감정과 저항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은 어린이 독자에게도 '왜 말하지 못할까?', '말하고 싶은 것을 왜 숨기게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답을 찾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서, 비판적 사고와 감정의 해석을 유도하는 교육적 효과를 지닙니다.

또한, 오늘날의 표현의 자유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온라인에서의 혐오 표현, 교실 안에서의 침묵 강요, 가정 내에서의 감정 억압 등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억압'이 존재합니다. 『만국기 소년』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재의 우리에게도 “당신은 당신의 말을 제대로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가치임을 상기시킵니다.

어린이 인권 감수성, 지금 필요한 이유

단순히 현대사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 안에 ‘어린이 인권 감수성’이 깊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성이는 단순한 아이가 아닙니다. 그는 생각하고, 느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세계는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그의 침묵은 단지 시대 때문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작은 사람’으로 보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의 인권은 이전보다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학교에서 의견을 표현할 권리, 체벌 없이 교육받을 권리, 감정을 존중받을 권리는 법으로 명시되어 있더라도 현실에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국기 소년』은 그 지점을 아주 민감하게 건드립니다. 누군가가 웃지 않는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해성이는 결코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망설이며, 현실에 적응하려 애쓰는 평범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모습이 현실 속 아이들과 너무도 닮아 있기에, 독자들은 해성의 마음을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 ‘인권 감수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됩니다.

감수성은 배움보다 먼저 오며, 교육보다 더 오래 남습니다. 『만국기 소년』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정보나 교훈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대신, 느끼게 하고, 질문하게 하고, 공감하게 합니다. 이것이 진짜 감수성 교육이며, 인권 교육의 핵심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무언가에 적응하고, 맞추고, 침묵하기를 요구받습니다. 이 책은 그런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이의 감정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나서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아이들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만국기 소년』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만국기 소년』은 말하지 못했던 시대를, 말하지 못했던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억압과 침묵, 질문과 감정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은 단지 과거를 그린 동화가 아닙니다. 오늘날 아이들의 감정과 말의 권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지금 필요한 현대사 교육이자 감수성 교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