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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이, 침묵 속 소녀의 감정과 조용한 성장

by eeventi 2025. 4. 19.

『온양이』는 선안나 작가의 첫 장편소설로, 10대 소녀가 지방 도시 온양에서 살아가는 일상을 배경으로 삶의 균열, 관계의 상처,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조용하면서도 밀도 높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지방 도시라는 공간이 한 인간의 정체성과 감정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문학적으로 탐색한다. 본 글에서는 『온양이』 속 소녀와 도시의 관계를 중심으로, 공간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 가족과 지역 사회의 침묵,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의 서사적 의미를 분석해 본다.

소녀가 따뜻한 시선으로 크림색과 갈색 줄무늬가 섞인 고양이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는 모습

온양이라는 공간, 소녀의 감정 지도

『온양이』에서 '온양' 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한 소녀의 감정이 투영되고 응축되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사회적 구조와 정체성이 교차하는 삶의 무대다. 온양은 수도권의 익명성과는 다른, 모든 것이 연결된 ‘좁은 사회’로, 이곳에서 주인공은 숨을 쉬면서도 동시에 갇혀 있다. 특히 10대 소녀라는 정체성과 맞물리며, 이 공간은 자유의 부재와 관계의 과잉이 교차하는 복합적 감정 지도로 작용한다.

온양의 거리는 짧고, 사람은 서로를 잘 안다. 이는 공동체적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에게는 일상적으로 감시받고 있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작가는 이러한 공간의 특성을 문장 너머의 분위기로 형상화한다. 이를테면, 동네 슈퍼마켓, 친구의 엄마, 학교 복도, 집 앞 골목 하나하나가 주인공의 감정 변화와 함께 살아 움직인다. 이처럼 소설에서 ‘공간’은 심리의 연장선이며, 심리적 갈등은 곧 도시와의 불화로 드러난다.

소설은 이러한 공간의 한계를 단순한 지방 도시 비판으로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한계 안에서 어떻게 감정을 조율하고, 살아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지를 탐색한다. 주인공은 온양을 떠나지 않는다. 떠나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안에서 울고, 말하지 못하고, 때론 무시당하며, 그러나 여전히 ‘온양이’ 안에서 자란다. 이는 ‘지방 도시’에 대한 기존의 시선, 즉 도망쳐야 할 곳이라는 인식과는 다른 태도다. 이곳이 나의 장소라는 수용,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은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이다.

또한 온양이라는 지명이 가지는 감각적 효과도 주목할 만하다. ‘온양’은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로, 따뜻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온양은 아이러니하게도 차갑고, 불편하며, 위로보다는 침묵이 흐른다. 작가는 이 대비를 통해 공간이 주는 이미지와 실제 경험 사이의 괴리감을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마치 “온기”를 기대했지만 “울음”으로 가득 찬 그곳, 그곳이 바로 주인공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는 침묵과 감정의 외면

이 소설은 한 소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작가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가족과 지역 사회가 어떻게 침묵을 강요하고, 감정을 억압하는지를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그려낸다. 이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의적인 무시, 감정의 비가시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집단적 ‘외면’의 구조다.

주인공의 가족은 온전하지 않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감정적 무력감, 그리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늘 조심스럽고 예민하게 움직인다. 말이 오가는 가족이라기보다, 말이 오가지 않기 때문에 무너져가는 가족. 작가는 이 과정을 소리 없이 무너지는 벽처럼 묘사하며, 독자가 불편한 정적 속에서 감정을 스스로 읽어내도록 유도한다.

학교 역시 다르지 않다. 친구들 사이의 소문, 작은 차별,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주인공은 점점 외로워진다. 특히 지방 도시 특유의 폐쇄성과 연결성은, 갈등이 생겨도 외면하거나 ‘그럴 수도 있지’로 덮어버리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주인공에게 심리적 단절감을 안기며, 동시에 분노조차 스스로 조절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소리쳐 말하고 싶지만, 말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네가 예민한 것’이라는 반응뿐이다. 결국 침묵은 생존 전략이 되고, 감정은 눌러 담겨진 채 더욱 깊어간다.

박제된 대화, 형식적인 관심, 무심한 어른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주인공은 점차 ‘말하지 않는 소녀’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히 피해자의 포지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침묵을 견디고, 해체하려는 작은 시도들을 함께 그려낸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조금씩 말하려고 노력하는 장면들, 그리고 그 말이 완성되기 전에도 울음을 통해 감정이 발현되는 순간들이 이 소설에는 있다. 이는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울음을 제대로 들은 적이 있는가? 침묵을 강요한 적은 없는가?

결국 이 침묵은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장치로 작용한다. 가족, 학교, 지역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녀의 목소리는 어떻게 소거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그 침묵을 가능하게 했는가? 『온양이』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공동체가 감정을 얼마나 쉽게 외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외면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를 고발한다.

성장이라는 이름의 고통과 말하기의 연습

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성장소설’의 문법을 따르지만, 그 성장의 과정은 빛나는 깨달음이나 눈부신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리고, 어둡고, 조용한 성장이며, 어떤 면에서는 성장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과정이다. 선안나는 이 불편한 과정을 섬세하고 진지하게 조명한다.

주인공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물도 아니고, 세상을 바꿀 목소리를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일상을 견디며, 작은 감정을 품고, 때로는 무너지면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배우는 것은 ‘말하기’와 ‘감정의 자리 찾기’다. 말은 감정의 해소라기보다는 존재의 증명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승인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한 문장을 꺼내기까지 수많은 망설임,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 오해에 대한 공포가 동반된다. 특히 10대 여성의 말은 사회적으로 종종 과장되었다고 폄하되거나, 예민하다고 몰아붙여지곤 한다. 주인공 역시 이런 시선에 이미 익숙하고, 말하기보다는 참고 견디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작가는 이 말하기의 과정을 감정의 터뜨림이 아니라 조용한 연습으로 그린다. 몇 번의 실패, 용기를 냈지만 외면당한 경험,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자기검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씩 나아가는 모습이 『온양이』의 가장 큰 울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성장이다. ‘변했다’는 드라마틱한 전환 없이도, 감정을 감정으로 인정하고, 그 감정을 말로 꺼내는 것. 그것이 이 소설 속 ‘성장’이다.

이런 성장의 끝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들음’이 필요하다. 말이 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들어주는 타인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그런 관계의 가능성도 소설 후반부에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완전한 화해나 이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감정을 ‘무효화’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온양이』는 그 작은 태도가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온양이』는 단순한 소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 도시라는 공간이 품은 정서적 굴곡과 공동체의 구조, 그리고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문학 작품이다. 선안나 작가는 고요하지만 뚜렷한 문체로, 소외된 존재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기록한다. 특히 오늘의 10대가 겪는 현실과 감정 구조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라면, 『온양이』는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지금 우리 곁의 ‘온양이’에게 귀 기울일 차례다.